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(문단 편집) ===== [[동부전선]] ===== || [[파일:Franz_Frheiherr_Conrad_von_Hötzendorf_1914_Charles_Scolik.png|width=100%]] || [[파일:1024px-Franz_Graf_Conrad_von_Hötzendorf.jpg|width=100%]] || || 1914년, 콘라트 || 브리핑하던 모습[* 옆에 있는 사람은 콘라트의 보좌관인 루돌프 쿤드만(Rudolf Kundmann)이다.] || AOK의 총괄 지휘관인 콘라트는 6개의 [[야전군|군]]을 편성하였는데, 다음과 같다. * [[빅토어 단클 폰 크라스니크|빅토어 단클]] [[병과대장|기병대장]]을 제1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[[크라쿠프 대공국|크라카우]]에 배치. * [[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]] [[병과대장|기병대장]]을 제2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세르비아에 배치. * [[루돌프 폰 브루더만]] [[병과대장|기병대장]]을 제3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동부 갈리치아의 그룰라 리파강에 배치. * [[모리츠 아우펜베르크 폰 코마로프|모리츠 폰 아우펜베르크]] [[병과대장|보병대장]]을 제4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갈리치아의 첼름에 배치. * [[리보리우스 폰 프랑크]] [[병과대장|보병대장]]을 제5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세르비아에 배치. * [[오스카르 포티오레크]] [[병과대장|포병대장]]을 제6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세르비아에 배치. 콘라트는 동부전선에 있는 프셰미실(Przemysl) 요새로 출발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. 그전에 미리 가족들과 마지막 휴가를 떠났었다. 그 후, 폐질환으로 요양 중인 장남 쿠르트를 제외한 콘라트의 아들들은 장교로서 일찍이 전선으로 이동했다. 차남 에르빈은 제10기병연대로, 막내 에곤은 18살이었는데, [[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]]로 돌아가기 보다 셋째 형인 헤르베르트가 복무 중인 제15후사르연대에 지원하여 [[기초군사훈련]]을 받게 되었다.[* 헤르베르트는 이미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.] 89세였던 노모 바바라의 집을 방문하여 출발 전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. 황제와의 접견을 하기 위해서 콘라트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있는 [[쇤브룬|쇤브룬 궁전]]을 찾아갔다. 모임이 끝날때 노쇠한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콘라트와 거세게 악수를 하며 장군참모장을 독려하였다. >"무탈하게 모든 게 잘 될 것이다. 잘못되더라도 끝까지 해볼 것이다." [[8월 15일]], 콘라트는 [[프리드리히 폰 외스터라이히테셴|프리드리히 대공]]과 [[카를 1세|카를 대공]]을 대동하여 나머지 AOK의 참모들과 함께 특별 열차를 타고 이틀 만에 프셰미실 요새에 도착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